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본 제국 육군 (문단 편집) == 역사 == [[파일:external/upload.wikimedia.org/Franco-JapaneseInfantryTraining.jpg]] [[1864년]] 프랑스식 [[훈련]]을 받고 있는 [[쇼군]] 소속의 [[막부육군]]. [[에도 막부|막부]]가 무너지면서 이들은 [[일본군]]에 흡수된다. 공식적으로 '''[[대일본제국]] 육군'''이란 거창한 호칭을 사용한 것은 [[1877년]](메이지 10년) 이후의 일이다. [[1889년]] '[[대일본제국 헌법]]'이 제정되면서 군사 권한은 [[내각]]이 아닌 [[천황]]의 [[통수권]]에 속하게 되었다. 육군의 최고 [[지휘관]]은 [[대원수]]로 천황을 뒀고 육군은 육군대신(육군장관), [[육군참모총장]], 교육총감의 세 [[장관]]이 관리했다. 웃긴 것은 이들은 [[대장(계급)|대장]]이 아니라 [[중장]]이 한다.(대장도 있긴하다) 최고 [[보직]]과 최고 [[계급]]이 일치하지 않는데 이런 일본군의 괴상한 특징은 [[병과]]가 계급을 씹어먹는 문제를 나중에 일으키기도 한다. 육군대신은 [[육군성]](세계적으로 세계대전 전에는 육군과 해군을 관리하는 부처가 육군성, [[해군성]]으로 나뉘어져있었고 후에 통합작전의 필요성으로 인하여 국방성으로 통합된다.[* 영국같이 일찍부터 공군이 있던 경우는 육군성,해군성처럼 공군만 관리하는 항공성이라는 부서가 있었다.]), 참모총장은 참모본부([[육군본부]]), 교육총감은 교육총감부[* 한국엔 마땅히 비교할만한 기관이 없는데 굳이 따져보면 [[육군교육사령부]]와 [[육군사관학교]]를 합치고 [[군사특기]]와 병과 학교 모두를 합친 조직이라 보면된다.[* 한국도 육군교육사령부의 전신은 육군교육총감부로 육군교육사령부에 대응한다.] 한국은 두 곳 모두 [[육군본부]] 직할로 육군교육사령관과 육사 교장은 [[중장]] 보직이며 병과 학교의 경우 소장 보직인데 일본군 교육총감부는 대장, 중장급 한 명인 교육총감이 참모양성 육군대학교(참모본부 관할)을 제외한 군 기본 교육과 전반적인 군 교육과정, 모든 군사특기에 관한 위 모두를 총 관할한다.]를 지휘했다.[[1938년]](쇼와 13년)에는 항공 전력의 중요성이 대두되면서 육군항공총감부가 설치되었다. [[일본육군항공사관학교]]도 세웠고 여기 출신들은 패전이후 [[항공자위대]]의 초기 인원이 된다. 나중에 참모본부는 [[대본영]]에게 권한을 많이 이임하게 되나 군정권의 상당수는 유지된다. 기원은 [[1871년]] [[조슈]]와 [[사쓰마]], [[도사]] 등에서 징집된 천황 직속의 어친병(御親兵)이다. '''[[폐번치현]]'''이 이뤄지자 이들 어친병은 근위대가 되었다. 처음엔 [[사무라이]] 출신들로 군을 유지했지만 곧 [[징병제|국민개병제]]를 도입할 [[계획]]이었다. 이 과정을 주도한 것은 [[야마가타 아리토모]]였다. [[1874년]]에 징병령이 선포됐다. 그러나 징병제가 '사무라이를 모독한다'고 생각한 기존의 사족들은 불만이 많았다. 특히 [[정한론]]을 주장하다가 [[권력]]에서 밀려난 [[사이고 다카모리]]가 하야하면서 그를 따르는 장교들이 대량으로 사직했다. 이후 [[세이난 전쟁]]이 일어난다. 세이난 전쟁은 하야한 [[군인]]들과 남은 군인들이 벌인 것으로 [[칼]]을 들고 싸운 [[전쟁]]이 아니라 신식군대끼리 총들고 싸운 것이다. [* 다만 칼을 들고 싸운 전투도 있다.] [[파일:external/upload.wikimedia.org/800px-ThirdFrenchMissionToJapan.jpg]] [[1875년]]경의 일본 육군 장교들. [[1874년]] [[타이완 섬]]을 침략했다. 일본에선 이를 '''외정(外征)'''이라고 한다. [[1885년]]엔 [[프로이센]] 참모장교 멕켈 [[소령]]을 [[교수]]로 초빙했고 대대적인 [[개혁]]이 이뤄졌다. [* 그 이전에는 군사 의식까지 프랑스식으로 모방하는 등 프랑스의 영향력이 컸다. ] [[1894년]]에는 당시 [[동아시아]] 최대이자 최강이라 생각됐던 [[청나라]]의 군대를 압도적인 교전비로 찍어눌러 패배시켰으며 [[1905년]]에는 [[러일전쟁]]에서 승리하면서 사실상 [[동아시아]]에선 가장 강력한 군대가 된다. [[1차 대전]] 당시에는 [[영일동맹]]에 따라 [[연합국]]으로 참전해 [[독일 제국|독일]] 소유인 [[칭다오]]와 [[태평양]]의 [[섬]]들을 차금차금 점령한다. 전쟁으로 일본은 경기 붐이 일고 경제 규모가 급속도로 팽창한다. 또한 [[러시아 혁명]]이 일어나자 [[일본의 시베리아 개입|백군을 돕는다는 이유로 일본군을 시베리아로 파병했다]]. [[파일:external/upload.wikimedia.org/JapaneseArmy1900.jpg]] [[1900년대]]의 일본군 육군 복장. [[1920년대]]에는 다소 [[군축]]한다. 그러나 현역만을 줄였을 뿐 [[교련]] 제도를 창설하고 예비 [[장교]]를 계속 확보했다. 당시 일본 육군의 규모는 평시 [[편제]]의 1/3 수준인 10만명을 군축해 20만명 수준이었다. 그러다가 [[중국]] 침략을 본격화하면서 일본군은 다시 확장된다. [[중일전쟁]]을 일으키고 [[소련]]과는 불가침 [[조약]]을 맺는데 그 동안 해군이 '''[[미국]]'''과 [[태평양 전쟁|전쟁]]을 일으킨다. [[1941년]] 일본 육군은 51개 사단 규모였다. 숫자는 약 170만이었다. [[영국]]과 미국은 [[중화민국]] 정부를 적극 지원했고 소련이 [[1945년]]에 일본에 [[선전포고]]하면서 일본 육군은 완전히 패배한다. [[관동군]] 중 상당수는 소련에 [[포로]]로 끌려가 살이 에는 노역장 신세를 져 생을 마감하는 일본군도 있다. [[파일:external/upload.wikimedia.org/1024px-%22Japanese_Army_Uniform%22_-_NARA_-_514675.jpg]] [[1938년]]에 바뀐 [[전투복]]. [[한국인]]들에게 익숙한 옷이다. [[1945년]] 무렵이면 이거마저 만들 [[돈]] 아낀답시고, [[국민복]]에 부착물만 바꿔 육군복으로 쓸 수 있다는 규정을 만들어 [[신병]]들에게 [[군복]] 조차 지급 안 하는 꼼수까지 부렸다.[* 아닌게 아니라 실제로 국민복이 디자인은 물론 색상까지도 군복과 대동소이 했다. 비슷한 시기 [[나치 독일]]도 군복의 사이즈를 줄이다 말년에는 평상복에 휘장이랑 완장만 붙여 [[국민돌격대]]에게 지급했다.] [[군복/일본군]] 항목 참조. 규모로 볼 때 [[1870년]]에는 12,000명 수준이었다. 그러던 것이 [[1900년대]]에는 12개 [[사단]]으로 38만명이 현역으로 근무했다. [[1941년]]에는 41개 사단에서 46만명이 [[현역]]으로 일했는데 2개 사단이 [[조선반도]]와 일본에 주둔했고 12개 사단은 [[만주]], 27개 사단은 만주를 제외한 [[중국 대륙]]에 주둔했다. [[1945년]]에는 145개 사단에 5백만 명 규모였다. 최대로 컸을 때는 609만 명이었다고. [[제2차 세계 대전|제2차 세계대전]] 당시에 150만 6,000명이 전사했으며 비전투 상황에서 사망한 인원을 합치면 256만 6,000명 수준이다. [[민간인]] 사망자는 67만 2,000명이며 상당수는 [[오키나와]] 출신이다. 81만명이 [[실종]]됐으며 7,500명이 [[연합군]]에 포로로 잡혔다. 포로의 비율이 비정상적으로 낮다. 타이완 침공 때는 543명이 [[사망]][* 전투로 사망한 자는 12명이고 531명은 질병.]했고 청일전쟁 때 13,823명, 러일전쟁 때 80,000명[* 전사자는 47,000명, 나머지는 질병.] 가량이 사망했다. [[제1차 세계대전]] 때는 칭다오에서 [[영국군]]과 연합을 맺어 독일-[[오스트리아군]]과 싸워 1,455명이 전사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